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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는 자"로 남을 수 있기를--빌며
작성자: 우리들항외과 대표원장박철영    작성일: 2026-06-09   조회수: 418   
"생명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는 자"로 남을 수 있기를 빌며
A,3mm의 주름 속에서 분자생물학의 우주를 읽다
내시경을 잡은 의사에게 대장암의 발생 경로와 최신 분자생물학적 기전은 단순한 학문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시경 화면 속 조그만 병변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전심전력하여 찾아내게 만드는 '의사로서의 양심이자 나침반'입니다.
화면 속 작은 혹을 마주하는 찰나, 내 머릿속에서는 이 세포가 암으로 진화해 온 거대한 서사가 여러 편의 영화처럼 동시에 상영됩니다.
대장암은 이제 예전처럼 “용종이 오래되면 암이 된다”는 단순한 명제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상 점막이 전암성 병변을 거쳐 침윤암과 전이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유전자와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먼저 망가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경로를 밟는 '다중 우주'와 같습니다.

B,암(癌)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네 가지 각본
1.정통 루트 (CIN: 염색체 불안정성)
전통적인 경로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세포가 잘못된 성장 신호를 받으며 '정상 점막 → 선종 → 진행성 선종 → 침윤암'으로 우직하게 진화합니다.
2.DNA 복구 실패 루트 (MSI: 미세위성 불안정성)
DNA 수리 시스템(MMR)에 결함이 먼저 생긴 뒤, 반복되는 유전 서열에 돌연변이가 맹렬하게 쌓여가며 암으로 돌진합니다.
3.톱니 루트 (CIMP: CpG 섬 메틸화 표현형)
톱니모양 병변(특히 SSL)에서 시작되어 광범위한 유전정보의 메틸화 차단을 통해 암으로 이행합니다. 때로는 이 CIMP-high가 DNA 수리 유전자(MLH1)를 마비시켜 MSI 경로와 뒤얽히기도 합니다.
4.염증과 미생물 루트 (Microbiome 축)
장내 미생물-대사체 축의 불균형과 나쁜 미생물 환경의 도움을 받아, 주변 면역세포를 무력화하면서 세포가 암으로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C.차이와 반복, 그리고 8만 번의 마주침
내시경 화면에 잡힌 3mm의 작은 돌출물 앞에서 나는 고뇌에 찬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이 혹은 저 네 가지 경로 중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원인은 무엇이며, 지금 내 앞에 누워 계신 이 분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이 시작됩니다.
내시경관을 밀어 넣는 행위는 지난 30년간 8만 번이나 '반복'된 일상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대장도, 그 어떤 세포의 주름도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매번 만나는 장(臟)은 저마다 고유한 분자생물학적 '차이'를 품고 있는 완전히 새로운 우주였습니다.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채고 변이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8만 번의 반복이 나에게 선물한 은총입니다.
나는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시경을 잡습니다.
선생님이었던 설대위 박사님의 말씀처럼
"생명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는 자"로 남을 수 있기를. 나의 이 고단하고 정밀한 손놀림이 나와 함께 숨 가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 동료 직원들, 그리고 차가운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기를.나아가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 공동체에 따뜻한 치유의 빛으로 기입되기를, 나는 매 순간 심연의 길 위에서 간절히 빌어봅니다.
우리들항외과대표원장 박철영 2026 년 6월 9일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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